Menu Skip

만덕을 이야기 한 사람들

정조의 특명으로 지어올린 ‘만덕전’

정조어진
정조어진

김만덕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를 넘고 여성의 몸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제주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당시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 임금은 김만덕의 삶을 널리 알려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고자 신하들에게 김만덕 전기를 집필하라 명을 내렸다.

채제공의 기록 (1720년~1799년)

채제공 초상
채제공 초상

번암집
번암집

만덕의 성은 김 씨이니 탐라에 사는 양가집 딸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생집에 의탁하여 기생이 되었지만, 나이 스무살이 넘어 관가에 하소연하니 기안에서 그의 이름을 없애고 다시금 양민으로 되돌려주었다.
탐라에 큰 기근이 들어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육지에서 사들였다. 모두 만덕의 은혜를 찬송하여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네”라고 했다. 김만덕은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서울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어서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내의원 의녀로 삼아서 모든 의녀의 반수에 두었다. 만덕의 이름이 서울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들 모두 만덕의 얼굴 한 번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 없었다.

정약용의 기록 (1762년~1836년)

정약용 초상
정약용 초상

여유당전서
여유당전서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에 실린 몸으로 과부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 바다의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함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중동(重瞳)이고 종의 신분으로 역마(驛馬)의 부름을 받았고, 기녀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다.

박제가의 기록 (1750년~1805년)

박제가 초상
박제가 초상

정유각집
정유각집

정유각문집
을묘년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자 여인 만덕은 곡식을 내놓아 백성을 진휼하였다. ……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 …… 여자라는 운명에 항거하여 창명을 건너 서울의 궁궐에 가서 임금님을 알현하고 명산을 구경하였으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넉넉하게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다.

 

다른 시각으로 기록한 만덕 이야기-심노숭

심노숭이 쓴 만덕이야기는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 분위기 속에 여성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어두운 면이었다. 또한 심노숭은 채제공과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이었기에 더욱 강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만덕이야기를 기록했다.

기녀 홍도가 남긴 시

만덕이 왕의 은혜로 서울에 왔을 때 당시 장안에 이름을 떨쳤던 기녀 홍도가 만덕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덕을 칭송하며 쓴 시

만덕(萬德)

여의행수 탐라기녀가(女醫行首耽羅妓)
만 리 물결에 바람 두려워하지 않았네(萬里層溟不畏風)
또 금강산 깊은 곳 향해가니(又向金剛山裡去)
향기로운 이름 교방에 남으리(香名留在敎坊中)